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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베트남 러브스토리, 전쟁과 국경을 초월한

  • 작성자   손우락
  • 작성일15-09-30 18:14
  • 조회  21,2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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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APORE GOOD NEWS 115

전쟁과 국경을 초월한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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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마켓 소식
 


전쟁과 국경을 초월한 러브 스토리
1975년 당시 23세였던 나는 사이공의 건설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멀리서 포성 소리가 들리고, 

모두들 철수, 탈출하는 사람들로 매우 어수선한 사이공 시내 있는 방콕뱅크에 회사일로 방문 하여, 

TT 입금을 확인 하고, 현금을 찿기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태국인이 주인인 은행으로, 태국에서 유명한 은행이며, 이 은행의 주인은 세계랭킹이 있는 부자임) 

평소 알고 지내던 같은 또래의 미스하잉이 다가와서 부탁할 것이 있다고, 근무 시간 후에 만나자고 하였다. 

저녁시간 근처 커피숍에서 나는 미스하잉과 만났고, 이야기를 들었다. 

부탁은 MARRIAGE CERTIFICATE (결혼 증명서)를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외국인과 결혼한 증명서가 있어야 여권을 만들어 외국으로 탈출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싱가폴 사람인 것을 아는 미스하잉이 결혼증명서를 만들어, 가족과 함께 사이공을 탈출 할 계획 이었던 것. 

아직 철이 없던 그때, 나는 흔쾌히 동의 했고, 다음날 오전에 미스하잉을 만나서 결혼 증명서를 만들고, 

사진관에 가서 결혼 사진도 찍었다. 

이 결혼 증명서가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은 몰랐다.


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 되기 한달 전 우리 회사는 철수 하였고, 나는 싱가폴로 돌아 왔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회사에 열심히 다니며, 바쁘게 지내고, 여자 친구도 사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10개월도 더 지난 시점에 이민국에서 나를 호출 하는 편지를 받았다.

왜 나를 부르는지, 전혀 모른채 이민국에서 담당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나쁜 사람 대하듯이 쳐다보던 공무원이, 다짜고짜 왜 배우자를 전쟁 속에 남겨 두고 혼자서 사이공을 탈출했느냐는 것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는 결혼을 한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스하잉 이름을 대면서, 당신은 그 여자와 결혼 하였고, 그 사람이 혼인 증명서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 태국의 난민촌에 있으니, 가서 확인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머리가 갑자기 딩 해지면서 (Dizzy) 어지러워져서 콜라를 마시면서 다시 생각을 해 보았다. 

그 결혼 증명서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그냥 외국으로 탈출 하는데 만 사용 한다는 것이었는데. 

부모님께는 거짓말을 하고, 태국, 방콕으로 가서 UNHCR (유엔 난민 기구, 아시아 헤드오피스가 방콕에 있음)를 

방문하여 난민 방문 허가증을 만들어, 촌부리의 난민촌을 방문 했다. 

(촌부리는 파타야 가는 중간에 있는 도시로, 태국 육군본부가 있는 도시임) 

먹을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 되어 음료수 몇 개를 들고 한참을 기다려 만났다. 

일년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미스하잉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리곤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 난민촌을 나가기 위해서는 가족이나 친척이 와서 데려가야 하며, 자기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던 예쁘장한 얼굴의 미스하잉이 아니었고, 바짝 마른 몸에, 보기에도 처참한 몰골 이었다. 

전 재산을 팔아서 비행기표를 구했으나, 비행기는 타지 못했고, 태국으로 가는 난민선을 타고, 태국에 왔으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친척도 없다는 것이었다. 

기다리라고 한 후, 밖으로 나와 먹을 것을 잔뜩사서 미스하잉에게 주었다. 

싱가폴에 가서 알아보고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돌아서는 내 옷소매를 붙잡고 살려 달라는 부탁 소리와 함께 옷속에 감춰 두었던 결혼 증명서와 

결혼사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도 눈물이 나왔다. 이것도 인연인가?  

나는 사실 그녀와 은행에서 일 때문에 만났고, 은행에서 대화를 나누었을 뿐, 서로 깊이 사귄 적은 없었다. 

태국에 올때는 냉정하게 정리하고, 결혼증명서는 가짜라고 이야기 하고,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싱가폴로 돌아갈 생각 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싱가폴에 내리자 마자, 사귀던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리곤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했고, 한참을 말없이 둘이 앉아 있었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나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결혼증명서를 만들고 드레스를 입고 결혼사진을 찍었다면, 결혼한 것이다. 

가서 데리고 와라. 우리는 이제 그만 만나자. 화가난 모습을 아니었지만, 차갑게 말하곤 뒤돌아 가 버렸다. 

그 순간 머리가 맑아 지면서, 정리가 되는 것 이었다. 

그래 그게 맞는 것이야, 방콕에 가서 하잉를 데리고 오자.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 말씀 드렸고, 부친으로부터 심하게 야단을 들었다. 

어디가서 부모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결혼하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이민국을 방문하여 절차를 알아보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비행기를 타고, 

다시 태국으로 가서, 결혼증명서, 결혼 사진을 가지고 간 사진기로 촬영하고, 

복사를 하여 다시 싱가폴로 돌아오고, 부모님께 결혼 사진을 보여주자, 부친의 화가 수구러 드는 것이었다. 

태국의 UNHCR 를 두번 더 방문하고, 싱가폴 이민국에서 증명서를 발급 받기까지 무려 4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태국의 촌부리에서 하잉 만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하잉의 동생들과 부친을 철조망 안에 남겨 두고 떠나올 땐 참 슬펐다. 

법이란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운지… 하잉이 싱가폴 여권을 받으면, 나머지 가족을 싱가폴로 데리고 올 수 있으며, 

당장 함께 올 수 있도록 서류를 발급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싱가폴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경찰 본부로 옮겨가 3일을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나무로 만든 허름한 집을 하나 빌려서 간단한 살림을 시작 하였고, 

친구들과 친척들을 모아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혼인식을 대신 하였다. 

함께 살면서야 알게 되었다. 하잉이 사이공 대학을 나왔고, 공부를 잘했다는 것, 그리고 영어 실력도 좋았다. 

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하잉은 곧바로 싱가폴의 방콕 은행을 찿아 갔고, 서로 연락을 주고 받던 옛 동료를 만나서 그날로 취직이 되었다. 

사이공 함락 때까지 열심히 일해준 내 아내를 그 은행은 알아보고, 인정해 주었다. 

60세 퇴직때까지 내 아내는 싱가폴 방콕은행에서 일했다.(싱가폴 세실 스트리트에 방콕은행이 있음) 

싱가폴에서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바로 옆에 있는 시댁에 매일 들러서 열심히 집안일을 해서 인정을 받았다. 

이민국을 수 백번 드나들어, 6개월만에 집사람은 싱가폴 여권을 받았다. 

빨리 태국으로 가서, 동생과 부친을 데려 와야 한다는 생각에 집사람은 하루도 마음이 편치 않아다. 

태국으로 떠나기전 날 부모님께 내일 간다고 인사를 했다. 

부친이 낡은 금고를 열고 $1,000을 집사람에게 주면서, “빨리가서 가족을 데려와라, 난민촌에 남겨두고 잠이 오겠느냐”.  

돈을 받으면서, 집사람은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우리 결혼을 반대하던 부친이 이렇게 해 주실 줄은 몰랐다. $1,000 은 큰돈이다. 

이 돈으로 다른 집을 임대해서 가족을 살게 하라는 뜻 이었다.


태국에 내려서, UNHCR 를 방문하여 증명서를 발급 받고, 시장으로 가서 먹을 것을 잔뜩 사서, 촌부리로 갔다.  

6개월만에 촌부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집사람은 계속 울고 있었다. 

그 동안 여권이 없는 집사람은 태국에 올 수 없었고, 내가 두번을 방문 하였었다. 

하잉의 동생들은 누나를 보고 소리내어 울었고, 장인은 내 손을 잡고, 고맙다, 고맙다는 말만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다시 몇일을 기다린 끝에 우리 모두는 비행기를 타고, 싱가폴로 올 수 있었다. 

양가 모두 함께 만나는 날, 장인어른은 내 부친 앞에서 무릅을 꿇고 감사 인사를 하였다. 

그 이후로 두 분은 친구가 되어 오랜 세월 친하게 지내셨다. 

싱가폴에 온 다음날부터 두 동생은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허드레 일을 시작 하였고, 

장인은 집에서 봉투를 붙이기 시작 하셨다. 부친이 주신 $1,000을 가지고 집을 구할 수는 있으나, 

여권이 나오면 동생들 공부도 시켜야 하고, 좀더 돈을 모아보자는 아내의 이야기에 동의 하였다. 

마침 그때 나는 중동의 건설 현장에 월급이 좋은 일자리를 구했다. 

계약은 3년. 잘됐다. 3년 동안 집사람은 식구와 함께 살고, 내가 돌아온 후에 집을 구하면 된다.

3년후 싱가폴에 돌아 왔을 땐, 처가 식구 모두 싱가폴 여권을 가지고 있었고, 

내 아들이 태어나 3살이 되어 있었다. 

뒤 돌아 보면, 그 후로 나는 어려운 일 없이 살아 올 수 있었다. 

모두 그 결혼증명서 때문 이었다. 그것 때문에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

후기 : 추석 명절을 맞아, 훈훈한 러브 스토리를 들려 드립니다. 추석 명절 잘 보내세요.
제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올해 63세인 미스터 탄의 이야기를 적어 보았습니다.  
한편의 영화와 같은 러브스토리 입니다.
베트남과 가까이 있는 싱가폴에서는 충분히 있음직한 스토리 입니다.
미스터 탄의 가족은 모두 행복하게 싱가폴에 살고 계십니다.

연금보험 안내
연금액과 기간을 개런티하는 연금상품을 구입 하시기 바랍니다.
투명한 경영과 안전한 환율 조건을 가지고 있는 싱가폴에서 노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싱가폴에서 이런 상품을 구입합니다.
암이 발병 하면, 암연금을 매월 받는 옵션 추가도 가능 합니다. (싱가폴에서만 구입가능한 상품)
동영상을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kD0UkffgZ8g

부동산 마켓 소식
9월12일자 소식으로 Additional Buyer’s Stamp duty를 거두어 들일 때가 되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SRX (Singapore Real Estate Exchange) 의 발표로는 정부 아파트와 개인 콘도 양쪽에서, 이제는 더 이상 부동산 거품의 위험성이 존재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싱가폴 MAS 의 규제로 은행 대출이 어려워 졌으며, Seller’s Stamp Duty (부동산 판매 세금) 규제가 충분한 효력을 발휘 하고 있음. 

세번째로는 2012년 이후 정부의 꾸준한 노력으로 부동산에 관한 정보 및 통계가 발표 되어, 누구나 이 정보를 알 수 있으며, 마켓의 투명성이 좋아 졌다는 점 입니다.


9월18일자 소식으로는 Mr. Ong (RHB Research Institue Singapore)은 

싱가폴 부동산 가격이 12% - 15%는 하락 하여야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철회 할 것이란 예측 이며, 

현재까지는 6.7% 정도만 하락 (최고치 2013년 대비) 하였으므로, 

금년에는 부동산 대책에 대한 조정이 없을 것이란 예측 입니다.
Mr. Kit (Citi Group 경제분석가) 도 부동산 가격이 5% - 10% 정도 더 하락 하여야만 정부의 대책 철회가 있을 것이란 분석 입니다.
두분의 분석이 비슷하므로, 금년에는 싱가폴 정부의 부동산 대책 철회는 없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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